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문단 편집) === 기타 각종 사연 === * 7월 2일 낮방송 중에는 급기야 [[https://youtu.be/739FElk4dFY?t=879|스튜디오에서 만나 얼싸안은 가족이 실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피난 와중에 부모의 손을 놓쳐 천애 고아가 된 뒤 식모살이를 하며 어렵게 살아온, 이제는 중년이 다 된 딸이 가족을 찾은 뒤 "'''왜 나만 버렸느냐'''"며 울부짖자 칠순이 넘은 고령이던 어머니가 충격에 못 이겨 그 자리에서 졸도한 것이다. 이 분은 다행히 [[https://youtu.be/b6SjFsBYG9A?t=60|응급실로 이송되어 회복되었다.]] 이 때 [[김동건(방송인)|김동건]]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쥔 채 "가만히 계세요. 움직이(게 하)지 마세요. 저리로 가세요. 누구 의무실에서 사람 좀 오라고 해주세요."하며 응급처치를 하는데[* 졸도한 사람을 함부로 움직이게 하면 위험하다.] '''"이게 무슨 비극입니까, 이게..."''' 라고 하며 타 지역국 연결 중에 잠시 흘렸던 눈물을 미처 닦지 못한 광경 등이 그대로 TV전파를 타고 생중계되었다. 그리고 또 전국이 울었다. 그래서인지 그 다음 날 다른 상봉가족에게 아나운서들이 "지금 어머님께서 혈압이 있어요! 흥분을 일단 가라앉히시고... 여기 물 좀 주세요!"하며 출연자들을 애써 진정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이 사건은 훗날 토요신문 1995년 4월 22일자 25면 기사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오열... 비탄... 연출 없는 '휴먼 드라마'>에서도 언급되었고, 2020년 방송의 날(9월 3일) 방영된 특집 [[모던코리아]]에서도 김동건 아나운서의 회고와 함께 소개되었다. 당시 뉴스 파노라마를 진행하던 김동건 옹은 "자기 집 아이가 두 시간 정도 사라졌을 때도 부모로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는데 몇십 년간 생이별을 하면 그 심정이 어땠겠느냐"라고도 당시 뉴스 오프닝에서도 언급하고 2020년에도 언급했다. 참고로 그도 황해도가 고향인 실향민이다. * 10월 1일 방송에서는 부산에 살던 이 아무개 씨가 부인과 6살 아들이 장모의 생일 때문에 여의도로 올라갔다가[* 본인은 경제 형편이 좋지 않아서 가지 못했다고 한다.] [[천재|아들이 여의도 광장에서 우연히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알아본 덕에 형제를 찾아낸 행운의 사례가]] [[https://youtu.be/v19aDc4jOUA?t=2091|나왔다.]][[https://www.youtube.com/watch?v=LrlBw_d-988|#2]][* 당시 6살이면 아직 한글을 못 떼는 경우가 많았다. 자식교육을 잘 시킨건지, 아이가 영특한건지 효도를 제대로 한 셈이다. 물론 아이 아버지도 방송내내 이 이야기를 자랑했다.] * 위에서 언급된 토요신문 기사에서는 세 살 난 딸을 버리고 30년을 수절하다 늦게 재혼한 부인이 천신만고 끝에 남편을 찾았으나, 남편은 전쟁의 비정함만을 곱씹으며 발길을 돌린 사연도 있었다. 이 사건은 "헤어진 혈연은 다시 결합할 수 있으나, 헤어진 부부는 이미 남남이다."란 정설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 박 아무개 자매는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 전쟁 이후 생활고로 각각 다른 집에 양녀로 보내져 헤어진 케이스인데, 이들 자매 중 한 명을 입양한 가정이 바로 시인 [[노천명]]의 집이라고 한다. 그런데 말이 입양이지 [[식모]]로 부려먹어서 본인은 엄청 고생했다고 한다. 이 자매는 7월 9일 방송에서 만나게 되었다. * 접수를 하러 왔다가 공개홀이나 여의도광장에서 딱 마주쳐 바로 만나게 된 가족도 여럿이었다. 당연히 이들은 굳이 방송에 나올 필요가 없었지만 개중 몇몇은 공개홀로 초대되기도 했는데, "[[https://youtu.be/phZd0LjNy4g?t=2490|어떤 사람이 계속 벽보를 떼 가서 아니 당신, 뭔데 자꾸 남의 걸 뗍니까 하고 보니까, 나랑 똑같은 이름들을 써놓은 플래카드를 갖고 있더란 말이지요... 그렇게 고모를 만났습니다.]]"라는 출연자도 있었다. 또 동생을 찾는 형이 벽에 벽보를 붙이고 갔는데, 20분 뒤에 동생이 '''바로 그 아래'''에 형을 찾는 벽보를 붙이려다가 자기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보고 기절초풍하면서 상봉한 경우도 있다. * [[https://youtu.be/f_B0TKY9j2g?t=2745s|사연 소개 당시 '''옆 자리에''' 앉았다가 서로의 팻말이 내용이 '''묘하게 비슷한''' 것을 보고 확인 끝에 상봉하게 된 오누이도 있다.]] * 너무나 어릴 적에 가족과 헤어져 이름밖에 기억을 못 하거나 혹은 가족과 자신의 이름조차도 기억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때문에 "마을에 큰 나무가 있었고, 외삼촌댁이 ○○리에 있었고"식의 추억을 기억해내는 것은 운이 좋은 편에 속했고, 몸에 있는 사마귀나 종기 자국, 화상 등의 신체적 특징, 전쟁 때 입은 각종 흉터 등[* 어렸을 때 동생 얼굴을 돌로 찍은게 기억나 그걸 서로 이야기하는 가족도 있었다. 또 3살때 잃어버렸던 딸을 머리에 있는 흉터자국으로 찾는 가족도 있었다.]을 서로 지역국 간 TV카메라에 보여주며 확인하는 사례도 많았다. 그런가 하면 얼굴만 보고도 서로 알아보는 케이스도 있다. 위의 허현철 허현옥 남매의 경우도 허현옥 씨가 오빠의 얼굴을 보자마자 '오빠다!'하고 중얼거리며 가슴 벅차했고(두 사람이 확실히 많이 닮기도 했다), 자신의 본명을 몰랐기 때문에 '흐린 날 이발소 집으로 입양되었다'는 사실로 서로 확신하였다. 사람의 기억력이나 나이에 따른 외모 변화가 개개인마다 천차만별이라 일어나는 일이었다. * 6.25 외에도 일본이나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 직후 귀국하면서, 혹은 38선 분단 이후 월남하면서 헤어진 케이스도 상당히 있다. 특히 경기, 강원도 북쪽과 일부 황해도 쪽에 살던 가족들 중 이런 사례가 많다. 고향이 [[만주국]] [[지린성|길림성]]이나 [[사할린]], [[일본령 가라후토|화태, 또는 가라후또]]라고 쓰여 있는 사람들을 보면 현재 시점에서는 굉장히 생경하게 느껴진다. 또한 한국지리나 국사 교과서에서 무심히 배우고 넘어가는 ''''시대별 인구 이동' 항목이 정확히 어떠한 비극이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중에서 중국에 이산가족을 두고온 사람들은 1988년도부터 중국 관광이 가능해지면서 만날 수 있게 되었기는 했다. * 소개된 사연들 중에 [[국민방위군 사건|국민방위군]][* 주로 "제2 국민병"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있다.]에 [[징집]]된 이후 사라진 사람을 찾는다는 사연도 제법 있다. 운좋게 상봉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당시 국민방위군이 겪었던 참상 수준의 실태를 생각해볼 때, 당시 징집된 장병들은 전쟁 당시에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국민방위군은 역사상 최악의 [[군수]]비리로 악명높은 사건이라, 전투에 투입되어 적과 싸우기도 전에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은 사람이 훨씬 많았다.] * 여러 번 확인의 기회를 가졌지만 안타깝게도 3번이나 동명이인으로 확인되어 결국 찾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 [[https://youtu.be/MMUBQFUyFpQ?si=9qRk3bAs3IThTRhq|사례]][* 남매의 상봉 중에 '''북한의 김일성 이노무시끼야!!! 너는 이 [[비극|사실]]을 아느냐!!!'''하고 외친다.]처럼 [[김일성]]에게 [[https://youtu.be/DQaRcYjtusk?t=960|욕설을 퍼붓거나]][* 사실 허현철-허현옥 남매의 오빠 허현철씨 역시 감정에 복받쳐서 '''"여러분! 다 같이 나와 김일성을 쳐부숩시다!!"'''라고 절규를 한다.] [[https://youtu.be/HBtezHaaURw?t=1090|스튜디오에 태극기를 들고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30대를 넘긴 중장년층~노년층은 대부분 전쟁을 온몸으로 직접 겪은 사람들이라 당연히 '''[[불구대천|김일성이 철천지 원수나 다름없었다.]]'''[* 1950년대 초반까지 태어난 이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1983년에는 30세만 되어도 전쟁 중에 태어났고, 그 이전 세대는 말할 것도 없다. 2020년대(2023년) 기준으로 대부분 70대 이상의 노년층이 되었는데 이 세대는 북한 정권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이 여전하고 안보 이슈에 민감한 계층이다. 자연스럽게 [[반북]] 성향이 뚜렷한 [[대한민국의 보수정당|보수정당]] 지지율이 가장 높은 계층이기도 하다.] 개중에는 김일성에게 [[복수]]하겠다고 [[https://youtu.be/x8fo5fie15E?t=1818|군대에 말뚝을 박아서 상사 말년차]]인 출연자도 있었다. * [[1.4 후퇴]] 후 서울에서 신문배달을 하다 실종된 14세 아들 이대식을 찾는 할머니가 [[https://youtu.be/7KYcg2fMTdk?t=1666|출연했었는데]], 2015년 3월 28일자 SBS [[그것이 알고싶다]] '소년북파공작원 - 우리는 총알받이였다' 방송에서 밝혀낸 바로는 소년 [[북파공작원]]으로 선발되어 북파되었다고 한다.[* '''[[정치범수용소/북한|정치범수용소]]'''에서 그를 목격했다는 목격담이 있다.] 그리고 실종 60년 만에야 국가에선 [[1952년]] 사망한 것으로 통보했다. [[https://www.kukinews.com/newsView/kuk201503280123|기사 링크]] * [[설운도]]가 기억하는 케이스 중에는, 방송 출연자 중 상복을 입고 온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사연인즉 출연자의 어머니께서 이산가족이라 매일같이 KBS 공개홀로 나오다가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는데,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혹여나 어머니가 찾으시던 가족이 나올지 몰라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스튜디오에 나와 있던 것이라고. * 이 방송이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서울 동작구에 거주 중이였던 한 노인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노인의 아들에 따르면, 노인은 1.4 후퇴 때 부인과 3남매를 북에 남겨둔 채 동생과 함께 월남하였는데, 이 방송을 지켜보며 눈물로 지내다 7월 2일 오후 5시 반쯤 말없이 밖에 나가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070400209201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07-04&officeId=00020&pageNo=1&printNo=18999&publishType=00020|이 사연이 실렸던 기사 원문]]) * 삼남매의 사연도 기구하다.[[https://youtu.be/611qAffIPNM?t=2264|#]] 6.25 때 일본 사람이라 쫓겨다니면서 굴에서도 살다가[*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말기에 조선 사람들을 동원해서 파들어간 방공호다. 이 당시 일본 본토는 미군의 전략폭격으로 [[일본 본토 공습|도시가 잿더미가 되었고]] 패전 후에도 집이 없어서 방공호에서 기거하는 빈민들이 많았다. [[반딧불이의 묘]]나 [[맨발의 겐]] 등의 작품에서 이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등장한다.] 부모님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후 남매가 머슴살이를 하고 여동생인 허신자가 염병([[장티푸스]])에 걸리기도 하는 등 고생을 하다, 부산에 살던 외숙모가 외롭다고 여조카를 맡기라고 해서 떨어졌고 이후 외숙모네는 서울로 이주했다. 하지만 이 외숙모가 조카딸을 때리는 [[아동학대|학대]]를 자행하자 견디지 못하고 여동생이 가출을 하면서 소식이 완전히 끊겨 버렸다. 외숙모에 대한 울분이 30년이 지난 시점에도 가시질 않는지, 오빠에게 외숙모의 생존여부를 물은 뒤 바로 '그 개같은 년, 잡아 먹을 년' 이라며 욕을 퍼붓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삼남매는 일관되게 서로를 일본 이름으로 부른다. 사실 여동생의 등록명 '신자'가 바로 일본 이름 노부코(信子)를 한국식 발음으로 발음한 것이다. 그리고 둘째오빠 이름은 이사무(勇)고 큰오빠는 요시(芳).[* 이들 남매의 한국이름이 일본식 이름을 한국 한자 발음으로 한 것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큰오빠의 이름은 일본어로 요시로 읽는 '芳(방)'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방송중에 사회자가 한국이름이 뭐냐고 묻자 "허방"이라 대답했다.] 그런데 이 남매의 부모가 모두 일본인인지는 이 영상만으론 확실하지 않다. 외삼촌이 대한민국군 중령이었다고 하니 어머니는 한국인이고 아버지만 일본인일 가능성이 높다. * [[일본인]]이 [[https://youtu.be/DQaRcYjtusk?t=1444|직접 스튜디오를 찾거나]] [[https://youtu.be/DQaRcYjtusk?t=1243|서신을 보내]] 가족을 찾는 경우도 있었다. 주로 [[일본 제국]] 시절 식민지였던 조선, 만주국 등에서 현지 통치기관에 근무하거나 파견을 와 생활하다가 패전을 맞아 [[히키아게샤]]가 되어 귀국길에 오르는 길에서 헤어지거나 가족중 일부가 허신자 씨 남매처럼 [[일본계 한국인]]이 되면서 가족과 헤어진 경우였다.[* 만주국에 남은 [[히키아게샤]] 가족들도 중일 수교가 이루어지며 상봉을 하고 일본 국적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일본 사회의 [[인종차별]] 때문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거나 [[야쿠자]]로 전락하거나, 그것마저도 힘든 사람들은 외지에 터를 잡고 살다 [[나리타 투쟁|나리타 공항]] 같은 경우처럼 정부의 핍박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 친가, 외가 어른들이 전부 [[독립운동]]을 했던 여성이 이모를 찾은 사례가 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ludR6H-IOdo|#]] * 6.25 때 각각 뿔뿔이 흩어진 5남매가 이 방송을 통해 전부 재회한 사례가 있다.[[https://youtu.be/bd0prdGmljA?t=331|#]] * 6.25 이전 아버지가 노역을 해서 얻은 돈으로 재산을 불린 가족이 [[국군]]에게 식량 지원을 했고 [[자본가]]라는 이유로 인민군에게 [[반동]]으로 낙인찍혀 월남한 남매도 있다. [[https://youtu.be/Khid0s3z-z4?t=188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